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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칼럼] 이순신과 기업경영 -1
24-05-02 14:11 486회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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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을 경영하는 CEO로서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 보면 그동안 감당하기 힘든 위기를 여러 번 겪었는데 그 중 큰 사건만 나열하더라도 1997IMF 경제위기, 2002년에는 카드대란으로 수백만의 신용불량자가 양산되었고, 그 시절 극심한 노사분규로 인하여 견디지 못한 기업들이 중국을 비롯한 해외로 공장 이전을 하면서 우리 회사의 사업 분야인 공장 자동제어 장비 시장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적자로 전락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리고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라는 우리와 아무런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일로 인하여 발생했던 금융위기가 있었고 최근에는 급격한 최저 임금 상승과 근로시간 단축이 만들어내는 국가 성장 동력 하락이 새로운 위기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회사와 내 가족의 최대위기는 창업 후 불과 10개월만에 마주친 가족들의 질병으로 인한 죽음과의 사투로 만들어졌다.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시작한지 3년 만에 접하게 되었던 애플사의 8비트 애플컴퓨터를 보고서 사업 아이템의 영감을 얻었기에 과감히 사표를 내고 창업했는데 정신없이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때 이제 갓 24개월된 아들이 백혈병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았던 것이다.

그 시절만 해도 백혈병은 불치의 병으로 알려져 있어서 애수의 크리스마스’, ‘러브 스토리와 같이 눈물을 짜내는 멜로영화의 단골 주제로 쓰일 때였기에 백혈병은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먼 나라의 슬프고도 끔찍한 질병으로만 알았다.

아들이 백혈병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아직 만 서른 살이 안 되었고 아내는 스물일곱 살이었으니까 신혼의 단꿈에 젖어있던 시절이었다.

아들은 백혈병으로 인한 합병증인 폐렴으로 중환자실까지 가면서 죽음과 사투를 벌이면서 우리 부부는 갑자기 밀어닥친 불행으로 인하여 고통을 감당하기가 너무도 힘들었고, 설상가상으로 그때 아내는 둘째를 임신해서 6개월 정도 되었는데 충격으로 인하여 유산했다.

그때만 해도 백혈병은 약물치료로는 완치가 거의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재발하는 경우에는 골수이식을 해야 했는데 타인과 골수가 맞을 확률은 10만분의1이지만 형제간에는 50%의 확률이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우리부부는 골수이식에 대한 준비를 하려고 다시 임신을 했었다.

둘째도 먼 훗날 철이 들었을 때 부모의 어쩔 수 없었던 선택에 대하여 이해해주리라 믿으면서......

둘째가 막 태어난 후 산모의 X-ray 검사를 한 의사가 이렇게 말했다.

산모가 폐결핵에 감염되어 있으니 백혈병 치료를 받고 있는 큰 아들 뿐만 아니라 태어난 둘째와도 무조건 격리시켜야합니다.”

그렇지만 우리형편에 백혈병 걸린 아들도 갓 태어난 아기도 누구에게 맡길 형편이 되지 않았기에 우리가족의 운명을 하늘에 맞기고 한 집에서 같이 생활하기로 했다.

아내와 같이 창업한 회사는 주인이 없는 상황에서 영업을 제대로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치료비는 상상을 못할 정도로 들어가면서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다.

아내의 폐결핵 치료비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 스트렙토마이신을 약국에서 구입해서 내가 직접 아내에게 주사를 놓았다.

돌이켜 생각해도 끔찍한 시간이었던 그때에 우리 가족에겐 또 다른 날벼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 다음해에 집안의 가장이었던 내가 위암진단을 받고 수술대에 몸을 뉘이게 되었다.

83년 창업에 84년 첫째의 백혈병과 뱃속의 아기 유산, 85년에 다시 임신한 둘째 출산과 아내의 폐결핵, 그리고 86년에 내가 위암수술을 받았으니 그때 우리는 온가족이 죽음의 그림자를 매일 매일 느끼며 악몽 속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내가 위암 수술 받았을 때 백혈병 투병중인 큰애는 44개월이었고 둘째는 태어난 지 11개월이었다.

아내와 나는 죽음의 그림자가 일렁이던 그 시절에 서로를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주면서 그 어려운 시간을 무사히 이겨냈지만, 요즈음도 그때 그 시절을 생각해보면 둘째가 벌써 30대 후반의 나이인데 아들보다 어린 나이에 그 어려움을 어떻게 다 이겨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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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 시절에 학교에서 수업을 대체하는 문화교실로 이름 붙여진 영화 관람 시간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반공보다는 통일을 국시로 바꿔야한다고 발언한 국회의원을 교도소에 수감시키던 공포정치의 시절이라서 우리가 보던 영화는 그 시절 독특한 카리스마로 스크린을 주름잡던 장동휘가 주연한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라던가 구월산의 빨찌산(파르티잔)과 같은 반공교육 영화가 많았는데 영화 속의 국군은 항상 선량하고 정의감에 불타는 역할로 나왔었고 적들은 표정부터 잔인하게 생긴 배우들이 잔혹한 행동을 일삼았기에 영화를 보다보면 누구나 못된 악마들을 주인공이 빨리 처단해주길 바라면서 영화에 빠져들곤 했었다.

또한 월남전이 미국과 월남의 패망으로 끝난 이후에 그 시절 가장 잘 나갔던 미국의 액션배우인 실베스트 스텔론이 주연이 되어 베트콩(베트남 민족 해방전선)을 무찌르는 영화를 보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했는데 주연을 맡고 있던 장동휘나 실베스트 스텔론은 영화 속에서 빗발치듯 쏟아지는 총알이나 포탄이 작렬하는 전쟁터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아서 임무를 완수했기에 흥분한 관객(나도 그중의 한명이었다)들의 격정적인 박수를 받곤 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영화 속의 영웅들은 사실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월남전이 미국주도의 연합군의 패망으로 끝난 후 전쟁터에서 있었던 아군(미군과 한국군을 포함해서)들이 행한 악행은 나의 귀를 의심케 했다.

, 전쟁터에서는 아군과 적군 가리지 않고 동료가 적의 탄환에, 포탄에 죽는 것을 본 피에 굶주린 병사들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었다.

그처럼 영웅을 만드는 영화의 장면들은 역사나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가상의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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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또 한명의 전쟁 영웅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이순신 제독(해군은 장군이 아니고 제독이 정확한 표현임)이었다.

일본열도가 오랜 세월동안 극심한 내전을 겪으면서 통일이 된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기간동안 축적된 엄청난 군사력을 조선을 거쳐서 명나라를 침략하여 자신에 대한 역모를 방지하고자 했다.

그 시절 일본은 실전경험 뿐만 아니라 조총과 같은 첨단 병기를 보유하였기에 군사력에서 조선을 압도했고 특히 해군력은 세계 최강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었기에 조선은 육전에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연전연패하면서 선조는 의주로 몽진을 했고 국토의 대부분이 초토화되었다.

일본군이 413일 부산에 상륙하고 수도 한양이 점령당한 것이 53일이었으니 요즘과 같은 이동수단이나 도로망이 없었던... 고작해야 소달구지나 덜컹거리면서 가곤 하던 시골길을 지나서 적들은 불과 20여일 만에 한양을 점령했으니까 저항다운 저항을 한 번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조선의 최정예 군사들을 거느린 신립장군은 부하장수들이 문경새재 매복 작전을 간청했는데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탄금대에서 조총을 가진 일본군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배수의 진으로 전멸되고 말았다.

바로 그 임진왜란에서 전쟁영웅이 있었는데 그분이 바로 이순신 제독이었다.

학창시절에 교과서에서 이순신에 대한 글도 읽고 성웅 이순신과 같은 영화에서도 접했던 인물이었지만 나에게 이순신은 영화의 주인공 장동휘나 실베스터 스텔론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그런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베트남전에서 미군이 참패했는데도 베트남전 영화 속의 실베스트 스텔론은 무차별적으로 베트콩을 살해하는 장면으로 미국과 같이 베트남 전쟁을 치렀던 국가의 국민들에게 카타르시스적인 즐거움을 안겨준 영화처럼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참패한 수모를 이순신의 작은 승리들을 확대과장해서 우리들의 울분을 잠시 동안 풀어주는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쟁다운 전쟁을 한 번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던 오합지졸의 조선 육군과 별 차이가 없는 조선 수군으로 세계최강 일본 수군을 연전연승으로 무찔렀다니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실체를 보여준 것은 이순신 제독이 감옥에 갇힌 이후 이순신을 대신하여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오른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단 한번의 칠천량 해전에서 거의 전멸한 것에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칠천량 전투에서 간신히 도망쳐서 살아남은 배설 장군이 이끄는 보잘 것 없는 배 12척으로 명량(울돌목)에서 일본 주력 함대 133척과 싸워서 이를 격파했다는 게 실베스타 스텔론처럼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이지 어떻게 현실에서 일어난 전투였겠는가?

나의 판단으로는 몇 백 년 전에 있었던 임진왜란에서 그나마 어느 정도 작은 승리를 했던 조선수군의 전과를 터무니없이 과장한 것으로 밖에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얼마 되지 않아서 만든 용비어천가에서도 그의 조상들을 신격화시켰었는데, 대한민국에서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이 수 백 년 전에 있었던 임진왜란에서 작은 승리를 거둔 장수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너무나도 쉬운 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렇게 나에게 있어서 이순신은 오합지졸 조선수군으로는 그나마 쉽지 않은 작은 승리를 엄청난 승리로 조작하여 만든 전쟁영웅이란 느낌이 강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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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환갑이 지난 나이에 우연히 접하게 된 이순신 포럼의 남해 관음포, 통영, 한산도 행 버스는 전설이나 신화로 생각했던 나의 잘못된 생각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이순신은 영화가 만든 조작된 영웅이 아니었고 임진왜란이라는 끔찍한 전쟁의 물줄기를 송두리째 바꾼 한반도 역사 속에 분명히 살아있었던 영웅이었던 것이다.

노량해전의 해남 노량과 관음포 그리고 한산대첩의 한산도의 수루와 통영의 통제영에서 나는 몇 번이나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눈물을 감추려고 하릴없이 하늘을 쳐다보곤 했었다.

그는 조정의 당쟁싸움을 일삼던 관료들과 무능한 왕으로 인하여 아무런 보급도 받지 않고 병사들과 같이 직접 농사를 지어 군량미로 비축했고 전함을 만들고 혁신적인 병기인 거북선을 만들면서 무에서 유를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한산도 대첩이란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전쟁을 진두지휘했던 바로 그 전쟁영웅이었다.

나는 칠십이 가까워진 나이에 비로소 이순신의 참모습을 접했고 역사속의 이야기가 전설이 아니라 사실이었던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순신에 대하여 알게 되면 될수록 나에겐 기업의 최고경영자라는 직업병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그는 어떻게 일본이라는 초강대국과의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을까?

이순신을 기업체 CEO에 대입을 해서 생각을 하면서 얻은 나의 이론은

1. 전쟁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측했고(미래 예지력)

2. 거북선이라는 혁신제품을 완성했고(첨단 제품의 혁신성)

3. 일본배의 약점을 알고 천자총통을 이용한 원거리 포사격(전략적 판단력)

4. 지형과 바닷물이 만들어 내는 해류의 활용(환경적 요인 활용)

5. 원칙에 입각한 따뜻한 리더십(따뜻한 리더십)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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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칼럼] 이순신과 기업경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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