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님! 스위스 알프스 트레킹 한번 가요.
다리에 힘없어지기 전에 꼭 한번 가고 싶어요.
아내의 요청에 나는 시원스레 대답했다.
오케이! 갑시다.
10여 년 전부터 아내는 스위스 알프스 트레킹을 하자고 나를 졸라댔다.
대학 산악부 후배였던 아내는 산에 있어서 나보다 더 산을 좋아했기에 내가 가는 산에는 암벽등반을 빼놓고는 거의 대부분 따라다녔다. 그랬기에 죽기 전에 스위스 알프스를 가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때마다 나의 답변은
“스위스는 비행기 시간도 많이 걸리고 물가도 너무 비싸니까 가까운 일본이나 대만에도 좋은 산이 많이 있으니 거기나 한번 갑시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돈 모아서 뭐 할라카노? 죽을 때 노잣돈 할라카나?”
그렇게 아웅다웅하는 중 3년 전 제2 경인고속도로에서의 교통사고로 아내는 척추가 골절되고 갈비뼈도 10개가 부러지는 중상(‘인생만사 새옹지마’ 편 참조)을 입으면서 담당 의사로부터 영구적인 장애가 예상된다는 말을 들었기에 건강할 때 아내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던 게 가슴 한곳에 커다란 짐이 되기 시작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사고 후 아내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끈질긴 재활운동을 한 끝에 사고 전 체력의 90% 정도를 회복하였다.
그리고서 올해 초에 스위스 알프스 트레킹을 다시 이야기하기에 두말없이 승낙을 했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때 영구적인 장애가 발생했거나 요단강을 건너 가버렸다면 내가 죽을 때까지 후회했을 것을 생각하니 더 이상 결정을 미룰 수가 없었다.
우리 부부는 고교 친구들을 설득해서 함께 스위스 알프스로 떠났다.
눈 두께와 트레커
우리의 트레킹은 그린델발트에서 아이거 익스프레스와 산악열차로 융프라우 요흐를 오른 후 아이거 북벽을 보면서 내려오는 융프라우-아이거 트레킹 코스와 체르마트에서의 마트호른이 주된 목적지였고 그 외에 그린델 발트의 피르스트 , 빌더스빌의 오베르베르크호른(2068m)의 고산화원, 체르마트의 협곡 트레킹 등 모두 6개의 트레킹을 계획했었고 실행에 옮겼다.
아이거 북벽!
아이거(3970m), 그랑드조라스(4208m), 마트호른(4478m)북벽을 알프스 마의 3대 북벽이라 부르는데 그동안 수많은 알피니스트의 피가 3대 북벽의 제단에 뿌려졌었다.
3대 북벽 중 난이도가 가장 높은 곳은 단연코 아이거이다.
아이거 북벽 초등 코스
아이거는 1865년 마트호른이 초등된 후 무려 70년이 넘게 어떠한 알피니스트의 정복도 허락지 않다가 마지막으로 초등이 이루어진 북벽이다.(아이거 북벽에서 1935년부터 1978년까지 43명 사망)
1936년 8월 18일 안데 힌토슈토이서를 포함한 4명의 독일,오스트리아 합동 등반대가 아이거 북벽 초등을 시도하던 도중에 그중 한명이 낙석으로 크게 부상을 입자 정상 등정을 포기하고 하산을 하던 중 오늘날 힌토슈토이서 트래버스라고 불리는 난코스를 통과하지 못하고 전원 사망했다.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힌토슈토이서 트래버스 부근에는 그린델발트에서 융프라흐요흐로 올라가는 산악열차가 잠시 머무는 아이거반트역 창문에서 불과 몇 미터를 남겨놓은 위치였고 구조대가 이들을 구하려고 창문을 깨고 나와 있던 상황이라서 그들의 죽음은 더욱 비극적이었다.
마침내 아이거 북벽은 1938년 헤크마이어 일행이 초등에 성공했다.
대학 산악부에서 암벽등반을 즐겨 하던 시절에 아이거 북벽 등반기를 읽으면서 경제적인 이유로 북벽에는 도전하지 못하더라도 훗날 여유가 생기면 아이거 북벽이 보이는 트레킹 코스를 걷는 것이 나의 버킷리스트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꿈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책을 접 한지 무려 47년이 걸렸다.
아내와 같이 아이거 글레처 역(해발2320m)을 출발하여 클라이네 사이덱(2051m), 알피글렌을 지나서 그린델발트 다운타운까지 아이거 북벽 옆의 트레킹 코스를 걸었던 시간은 나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함께 간 벗들은 클라이네 샤이덱 역에서 산악열차를 탔다)
하산하던 도중에 아이거 북벽의 등반기에서 읽었던 아이거 반트역 창문이 문득 생각나서 북벽을 스마트폰 카메라로 확대하여 자세히 관찰하니까 갤럭시24 스마트폰의 뛰어난 카메라 성능에 힘입어 창문이 제대로 잡혔다.
“여보! 아이거 반트역 창문이 저기 힌토슈토이서 바로 옆에 보인다! 그리고 저만큼 위쪽에는 하얀 거미(아이거 북벽의 난코스 지점)가 있고....” 감격에 차서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거반트 창문이 찍힌 확대 사진을 보여주니 아내는 별 관심이 없는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하긴, 아이거 북벽에 대한 나의 타는 목마름과 아이거 반트 창문 옆에서 죽어간 4명의 산악인들에 대한 처절한 생의 마지막 순간을 알지 못했던 아내는 내가 들뜬 목소리로 소리치는 의미를 느낄 수가 없었겠지.
트레킹 코스의 계곡 아래로 보이는 초원에는 알프스를 상징하는 풀을 뜯는 소떼들의 해맑은 워낭소리가 마치 음악소리처럼 들렸다.
거기다가 그린델발트 부근으로 걸어 내려오면서 만년설 아래로 보이는 스위스의 목가적인 분위기의 집들이 간간이 눈에 띄는 시간들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 되었다.
알피글렌 역까지는 주변에 트레커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지만 대부분의 트레커들은 알피글랜에서 산악열차를 타고 하산했고 거기서부터는 우리 부부 외에 젊은 커플 한 팀만 트레킹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는데 그 이유를 아는 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산악열차는 급경사 길을 오르고 내려가기 때문에 열차 레일과 레일 사이에 톱니바퀴 레일이 있어서 열차가 뒤로 밀리거나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게 제작되어 있는 게 신기했다)
급경사의 내림 길인데다가 그린델 발트 터미널로 가는 길이 조금 아리송해서 구글 맵에서 추천해주는 최단 코스를 선택했더니 길 같지도 않은 애매한 길을 안내해 주는 바람에 ‘이게 길이 맞기는 맞는 건가?’를 몇 번이나 되뇌면서 내려왔기에 더욱 그러했다.
허벅지가 얼얼해졌고 등산화 끈을 단단히 묶었는데도 워낙 경사가 급해서 발이 아래로 쏠리는 바람에 발톱이 빠질 것 같은 고통이 따르긴 했지만 스마트폰의 구글 맵의 길찾기 기능은 우리를 배반하지 않고 그린델발트 터미널까지 확실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산에서 남편을 따라다니면서 나의 호기심으로 인하여 일반적인 등산로를 벗어나서 길이 없는 능선이나 계곡에서 자주 고생을 했던 아내는 나에게 여러 번 이야기했던 “성명기를 만나면서 내 인생의 고행은 시작되었다.”라는 농담 같은 진담을 아이거 북벽 트레킹 길에서도 나에게 한 번 더 각인시켜주었다.
그래서 나도 농담 같은 진담으로 입을 막았다.
“누가 먼저 결혼하자고 옆구리 콕콕 찔렀어? 유영희! 바로 너지? 그리고 스위스 알프스 트레킹 가자고는 누가 먼저 이야기 했지?”
“퍽!”
아내에게 말을 함부로 하면 죄 없는 엉덩이가 고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