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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칼럼



《사랑은 행동이다》사랑의 힘
19-01-07 15:15 1,858회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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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사랑의 힘

사랑의 힘



 끊임없이 밀려오는 이 불안함은 어디서 오고 있나?

 대학 다니던 시절 밝은 표정의 친구들과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어도 신촌 독수리다방에서 허스키한 목소리의 DJ가 음악 해설에 더해서 들려주는 달콤한 음악에 젖어서 행복을 느낄 때도 대학 4년 동안 외삼촌, 외숙모님이 따뜻하게 보살펴주시는 그 시간에서도 나의 내면에서는 어딘지 모르는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끊임없는 불안감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산 친구들과 같이 등산을 하거나 암벽에서 초긴장상태에서의 짜릿함을 경험할 때는 잠시 잊혔다가도 다시 일상의 생활로 돌아오는 순간부터 내 영혼에는 마치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이를 감추고 있는 범죄자처럼 불안감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그 원인이 뭘까?

 그런데 그 불안감의 근본적인 원인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불안의 원인은 바로 ‘아버지’였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는 우리 가족이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공포의 원천이었다.

 몇날 며칠 동안 밤새도록 도박으로 있는 돈, 없는 돈 다 날리고 심지어는 집문서까지 잡혀먹고 퀭한 눈으로 돌아와 우리들과 어머니를 쳐다볼 때의 아버지의 눈은 아버지나 남편의 눈이 아니었다. 피에 굶주리고 살기로 기세등등한 짐승의 눈이었다. 마치 뭔가 트집 잡을 것이 있으면 분노를 발산하려고 작정한 그런 분위기였다.

 

 우리 다섯 형제들은 그런 아버지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방에 모여서 벌벌 떨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도박판에서 다 잃고 온 날에는 요즈음 식으로 이야기하면 분노조절장애 증상이 있는 아버지가 가재도구를 박살내는 소리가 온 집을 뒤흔들어 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 집의 집안 가구와 그릇은 1년에도 몇 번씩 다른 것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그런데 나에겐 1년에 두 번 찾아오는 해방의 시간이 있었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때 이종사촌(최상일, 훗날 어른이 된 후 KBS의 ‘한민족 리포트’에 킬링필드의 한국인 의사로 나왔던 바로 그 사람이다.)과 방학하는 바로 그날, 대구에서 완행 기차로 2시간 거리의 청도와 밀양 사이의 시골 마을인 유천의 강가에 있는 외갓집에 갔다. 외갓집이 바로 나의 해방구였다. 외갓집에 도착하면, 아니 외갓집으로 출발하는 그 순간부터 마치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교도소에 갇힌 죄수들이 갑자기 스피커를 통해 아름다운 음악을 들었을 때와 같은 완전한 해방감을 느꼈다.

 거기다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께서는 우리가 방학 때 오는 것을 누구보다 크게 반겨주셨고 방학이 끝나 갈 때에는 마당에 놀고 있는 토실토실한 토종닭 한 마리를 잡아서 맛있는 백숙을 만들어주셨는데 이 또한 먹거리가 부족한 그 시절에는 큰 행복의 한 가지였다.

 그렇게 외갓집에 있을 동안에는 만성적인 불안감에서 해방될 수 있었지만 방학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타게 되면 나를 괴롭히던 고질병인 회피할 길 없는 불안감이 시작되었고, 대구가 가까워지면 질수록 그 불안감은 증폭되었다.

 

 먼 훗날이 되어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방학이 되어도 어머니를 돕느라 집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누님과 여동생은 항시 그 지옥 같은 분위기에서 아무런 방어막 없이 그대로 아버지가 만들어 내는 13일의 금요일 같은 공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누님은 방학 때면 시골 외갓집에 가는 내가 너무 너무 부러웠다고 했다.)

 차라리 없는 게 더 나을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남편과 아버지로서 본연의 역할을 전혀 하지 않은 아버지로 인하여 혼자서 다섯 자식을 키우면서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를 대신 누님과 여동생에게 분출하셨다. 때문에 누님과 여동생은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분노에도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내가 그런 가정 분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서울의 명문대학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와 상일이를 대학 4년 동안 보살펴주겠다는 외삼촌께서 내 걸었던 최소 조건은 서울의 두세 개 상위권 대학의 공대에 입학하는 조건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 조건이 아니라면 가난한 가정형편으로 인해 학비가 싼 지방 국립대학에 진학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나놓고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만들어 내는 공포 분위기가 내가 서울의 명문대학에 꼭 들어가야하는 강력한 동기 중 한 가지였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까지 하위권에서 빌빌거리다가, 쇼생크 탈출을 하려고 고 3때 단 1년 동안 코피를 쏟으며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서울로 유학 올 수 있었다.

 

 내가 시험에 합격해서 서울로 유학을 가는 순간부터 아버지의 공포에서 빠져나와서 외삼촌 외숙모의 따뜻한 보호 속에 대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목표로 세웠던 대학에 입학했고 두 분이 만들어주신 따뜻한 가정에서 행복한 생활이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릴적부터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공포에 의한 불안감은 대학 4년 동안 만이 아니라 군대생활을 할 때도 꾸준히 나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었다.

 나의 이런 정신적 불안감은 대학 4학년이 시작되면서 찾아온 여자 친구(지금의 아내)와의 사랑이 영글어 갈수록 조금은 옅어지긴 했으나 우리 집의 치부를 여자 친구에게 들킬까봐서 전전긍긍했었고, 여자 친구 집안과 우리 집과의 경제적인 격차가 너무도 컸을 뿐만 아니라 그 시절 대학원을 다니던 여자 친구는 학벌에서도 나보다 앞서 있었기에, 사귐의 시간 동안에도 이 행복이 사상누각이 되어 쉽게 허물어지지 않을까 불안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여자 친구가 학벌이나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대학산악부에서 산행을 하면서 봤던 선배에 대한 좋은 모습만 간직해주었기에, 처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여자 친구의 고집으로 결혼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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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카우아이에서의 결혼 30주년

 


 아내와 결혼을 하고 나서 안양 비산동에서 신혼의 보금자리를 마련한 후에도 아내는 대학원 과정을 장인어른의 경제적 도움으로 계속했고 나는 방위산업체 연구소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이제는 나도 아버지에 얽매인 자식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독자적인 가정의 가장이 되어 더 이상 아버지에 대한 공포를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내와 함께 주말이면 등산을 하면서 우리만의 행복한 삶을 만들어 갈 수 있기에,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과 누님과 여동생에 대한 미안함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신혼생활 6개월 만에 항상 나를 지배하던 내면속의 공포와 불안감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태어나서 무려 27년 만에 느껴본 영혼의 자유로움이었다.

 나의 이 자유로움은 1984년 5월에 석현(큰아들)의 백혈병으로부터 나의 위암, 아내의 폐결핵, 그리고 임신한지 6개월 된 태아의 유산이 연속해서 닥치는 바람에 불과 4년이란 짧은 기간 만에 박살이 나고 말았다. 그때부터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죽음에 대한 공포가 우리 가족을 짓눌렀다. 하지만 내 곁에는 항상 따뜻한 마음으로 믿고 따르고 위로해주는 아내가 있었기에 어릴 적처럼 불안감이 나의 정신세계를 지배하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내와 함께 한 세월이 80년 3월부터이니 올해로 38년째에 접어들었다. 등산, 배낭여행, 암벽등반, 스쿠버다이빙 등 햇볕에 노출되는 야외 운동을 즐긴 탓에 내 얼굴은 어느새 주름살과 점투성이의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어떠랴. 그게 세월의 훈장인 것을… 아내와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았던 삶은 나에게 사랑의 힘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 주었다. 하지만 내가 아내와 알콩달콩 사랑하면서 살면 살수록, 가냘픈 몸으로 가정을 지키고 자식들을 공부시키느라 고생만 실컷 하시고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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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스쿠버다이빙

 


 그렇게 어머니와 자식들을 엄청나게 괴롭혔던 아버지였지만 경제적 지위가 자식에게로 넘어온 후인 칠십이 넘으신 후에는 본인의 잘못을 반성하면서 당신에 대한 어머니의 짜증까지도 다 받아 주셨다. 어머니는 젊었을 적에 아버지로 인한 만성두통에 시달리면서 ‘명랑’ ‘명신’이란 이름의 두통약을 매일 드셨는데 결국 어머니는 두통약에 의한 부작용(이 약은 효과도 좋고 가격도 저렴했지만 간경화를 유발하는 부작용이 심각하여 훗날 판매금지 되었다.)으로 노년에 간경화가 왔다. 어머니의 간경화가 간암으로 다시 폐로 전이되면서 당신의 잘못이 도화선이 되어 어머니께서 편찮으시다는 생각으로 아버지는 많이 괴로워하셨다. 그리고는 매달 한 번씩 대구에서 서울의 종합병원까지 함께 다니시면서 어머니의 따뜻한 친구가 되어주셨고 특히 어머니가 입원했을때는 병간호까지 솔선해서 해주셨다. 자식들도 어린 시절 아버지가 만들어낸 귀곡산장 분위기의 집에서 모두 바르게 잘 자랐기에 하늘나라에서는 어머니로부터 용서를 받으셨으리라 싶다.

 

 돌아오는 추석에는 영천 호국원에 합장해 계신 부모님 산소에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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