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로 설악산 입산이 전면 금지되었습니다.”
겨울 방학기간을 이용하여 동계 설악산 등반을 하려고 마장동 시외 버스 터미널 주변의 여관에 산행하기 전날 모여서 부족한 부식을 구입하고 배낭을 꾸린 후 이른 새벽에 설악산 가는 시외버스를 타고 가까스로 백담사 초입의 용대리에 어렵게 도착한 우리 팀(남자대원 5명, 여자대원 3명)에게, 입구를 지키던 산악 경찰관들은 한마디로 산행불가를 통보했다.
•어느 봄날의 설악산 수렴동 대피소
1978년 1월 강원도에는 눈이 엄청나게 내렸다. 특히 설악산 일원에는 무려 150cm나 되는 눈이 내렸다. 그 기록이 2014년 겨울에 깨졌다는 뉴스를 봤으니까 그 시절에도 보기 쉽지 않은 폭설이었다. 거기다가 내린 눈의 대부분이 우리가 마장동에서 장비를 꾸리던 전날 밤부터 시작해서 그날 새벽 사이에 내렸었다. 1970년대만 해도 겨울 장기등반을 하려면 장비를 준비하는 데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었다. 며칠 동안 설악산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그 시절에는 국립공원에서 야영하는 것이 불법이 아니었다.)을 해야 했기에 동계용인 윔퍼 텐트는 산악회 공용 장비를 사용한다 치더라도 동계용 비브람 등산화, 아이젠, 키슬링 배낭(장기등반 용 초대형 배낭)을 준비해야 하는 등 장비를 준비하는 데도 대학교 한 학기 등록금의 1/3은 들었다. 돈이 어디 풍족했나? 여기저기서 꾼 돈으로 간신히 장비를 준비해서 설악산 입구에 도착했건만, 우리는 어김없이 문전박대를 당했던 것이다. 요즘 같으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그날 우리는 산악경찰 아저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학 산악부라서 안전은 우리가 더 잘 챙긴다. 여기보다 수십 배나 더 위험한 히말라야에 가는 것도 안 막는데 설악산은 왜 못 들어가게 하나”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7시간이 넘게 걸렸는데 그냥은 절대로 못 돌아간다.” (폭설로 길이 막혔다는 뉴스를 들었지만 우리들은 가는 데까지 가보자며 우선 길이 뚫려있다는 홍천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가는 표를 끊어서 출발했고, 홍천까지 오는 도중에 라디오 뉴스에서 군인들을 동원해서 인제까지 길을 뚫었다기에 홍천에서 인제까지… 다시 원통까지… 마지막으로 용대리까지. 이렇게 버스표를 네 번이나 구입하면서 간신히 도착했기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거기다가 “내가 불과 두 달 전에 제대를 했기에 젊은 후배들을 안전하게 잘 챙길 수 있다.” 심지어는 “못 들어가게 하면 우리가 산행 준비하느라고 들어간 돈을 모두 돌려 달라.” 요즘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만 하여간 말도 안되는 온갖 생떼를 무려 2시간 넘게 부리다 보니까 질려버린 산악경찰 아저씨가 위험지역에는 들어가지 않는 조건으로 출입허가를 내주었다(우리가 설악산에 들어가기 불과 며칠 전인 78년 1월 7일 설악산 칠성봉 계곡에서 눈사태로 한양대 학생을 포함해서 4명이 숨졌고, 2년 전인 76년 2월에는 공룡능선에서 ‘1977 에베레스트 동계등반훈련’을 하던 최 수남 대장을 포함한 4명이 역시 눈사태로 사망했기에 입산 통제가 더욱 심해져 있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생떼가 우리들을 큰 위험에 빠져들게 할 줄은 그때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하고 입산 허가를 받은 것만도 좋아서 희희낙락하며 용대리 입구에서 백담사 산장까지 켜켜이 쌓인 눈을 러셀(눈을 다지면서 길 내기) 하면서 걷다보니, 겨울 어둠이 계곡을 완전히 뒤덮은 저녁 6시가 넘어서야 백담 산장에 도착했다. 추운 날씨와 늦은 저녁 식사에도 무사히 백담 산장까지 오게 된 것만도 기분이 들떠서 시끌벅적 소란을 떨면서 식사를 했다. 입산이 전면 금지 되었기에 산장에는 떼를 쓰고 들어온 우리 팀 말고는 다른 팀이 아무도 없었고 털보 산장지기도 눈에 갇힌 산속에서 2~3일 만에 처음 보는 등반대라면서 반가움이 더했는지 소란을 떠는 데도 편하게 대해주셨다.
그날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겨울 산에서 난방시설도 없는 산장에서 밤을 보내면서 그 시린 발을 어떻게 감당했는지 지금도 그날 밤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발부터 시려온다.
산행 계획상으로는 우리들의 첫날의 목적지가 옥녀탕 앞의 수렴동 대피소였는데 이런저런 일이 생기면서 어쩔 수 없이 첫날밤을 백담 산장에서 지냈기에 둘째 날은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바쁘게 서둘렀다. 6시가 조금 넘어서 아직도 어둠에 잠긴 산장을 출발했는데 워낙 많이 쌓인 눈으로 인하여 대원들이 돌아가면서 러셀을 하면서 길을 뚫느라 5시간 만인 11시가 훨씬 넘어서야 수렴동 대피소에 도달했다. 행동식량으로 준비한 싸늘하게 식은 식빵을, 분유 끓인 물에 적셔서 가벼운 점심 식사를 한 후 오늘 봉정암까지는 어떻게든지 가자면서 등반대장에게 준비되는 대로 앞장서서 끌면 내가 뒤에서 대원들을 독려하면서 따라 가겠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아이젠 매는 줄을 매고 푸는 것이 지금과 같이 편리하게 되어 있질 않아서 여성대원들의 경우에는 남자대원들이 도와주어야 했기에 후미에서 등반팀 동료들을 도왔던 나는 항상 출발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키슬링 배낭
그리고서 대피소 문을 나서는 순간… 아뿔싸! 새벽부터 지속적인 러셀로 지친 등반대장은 대피소 좌측으로 난 눈이 덮여서 흔적도 없는 등산로로 가지 않고 세찬바람에 눈이 날아가서 투명하게 얼음판이 반들반들하게 드러난 대피소 앞 옥녀탕 계곡의 얼음판 위를 통과하고 있었다. 동료들의 아이젠 묶는 것을 도와준 후 마지막으로 나의 아이젠 줄을 묶고 대피소를 출발했을 때는 우리 대원 여덟 명 중 네 명은 벌써 작은 얼음 절벽을 넘어서 올라가 있었고 다섯 번째 여성대원이 얼음 턱을 올라가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참고로 수렴동 대피소 앞의 옥녀탕 계곡은 지금은 오래전에 폭우 때 상류에서 굴러 내려온 돌들로 많이 얕아졌지만, 그 시절만 해도 여름산행 때는 바위 위에서 다이빙을 할수 있을 정도인 4~5미터 깊이였다. 또한 그 시절에는 설악산에서 취사, 야영, 그리고 계곡에서의 수영이 불법이 아니었음을 독자들은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그런데 다섯 번째로 얼음 턱을 올라가는 여성대원은 아담한 체격에 등에 진 배낭이 워낙 무거워서 혼자서 얼음 턱을 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았다. 바로 뒤에 따라가던 남자대원이 가까이 가서 얼음 절벽을 올라가는 것을 도와주는 순간! “와지직!”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의 체중과 배낭무게를 이겨내지 못한 얼음판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물에 빠진 두 사람은 간신히 얼음 난간을 잡고 버티는 상황이었고 계곡의 세찬 골바람과 영하 15~6도를 오르내리는 얼음 물속에서 머리만 물밖에 내놓고 있었다. 이미 얼음 난간을 올라간 네 명은 아래로 내려가기 위한 얼음 스텝이 붕괴해버려서 물에 빠진 두 명을 도와줄 방법이 없었기에, 얼음판 위에 남아있던 나와 후배대원 한명이 두 명의 구조를 감당해야 했다. 자일을 던져서 물에 빠진 두 명이 얼음판 밑으로 떠내려가지 않도록 묶은 후 나와 같이 있던 후배를 자일로 묶은 다음 얼음판을 기어가게 해서 먼저 두 명이 맨 배낭을 벗겨서 얼음판 위로 끌어 올렸다. 물에 빠지고 나서 배낭을 벗길 때까지 시간이 15분 가까이 흘렀기에 얼음 물속에 있는 두 명 중, 남자 대원은 얼굴이 시퍼렇게 변하기 시작하면서 저체온증에 빠져들고 있었다. 일반적인 생각으로 남녀가 물에 빠지면 당연히 여성대원을 먼저 건져 올리려고 했으나 남자대원의 얼굴색의 변화를 보고는 순서를 바꿔서 남자대원부터 먼저 끌어 올렸다. 뒤이어 여성대원을 구출했다(여자가 체지방이 많아서 얼음물 속에서 훨씬 더 잘 견딘다는 것을 이날 이후로 확실히 알았다. 같이 물에 빠진 남자는 저체온으로 얼굴색이 시퍼렇게 변하고 있었는데 여자는 나중에 구출했는데도 그때까지 얼굴이 발그스름하게 홍조를 띠고 있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수렴동 대피소에서 점심식사 후 출발한 직후에 사고가 났기에 대피소로 후퇴를 해서 옷을 갈아입히고 굳은 몸도 문질러주었고 대피소에 겨울을 대비해서 준비되어 있던 화목으로 군불을 때는 바람에 시간은 많이 경과되었지만 저체온에 빠졌던 후배도 많이 회복이 되었다. 우리들만이 있었던 대피소에서의 그날 밤! 다시 살아서 돌아와 준 후배들로 인하여 얼마나 행복한 밤이었는지… 웃고 떠드는 바람에 밤늦게까지 대피소는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다음날! 이틀 동안의 산행 일정에 차질이 생긴 우리들은 꼭두새벽부터 서둘렀다. 그날의 목표는 대청봉 부근의 군용 폐 막사(그 시절만 해도 시멘트 구조물만 남아있었던 때였는데 그 후 80년대에는 이 폐 막사를 보수해서 대청산장으로 잠시 사용했던 적이 있다. 그때까지는 아직 중청이나 소청에는 대피소가 없었다.)까지 잡았기에 우리는 어떻게든 대청봉까지 올라가기로 했다.
폭설 이후로 아무도 지나간 흔적이 없는 계곡의 깊은 눈으로 인하여 가슴까지 차오르는 눈을 러셀도 하고, 힘이 부치는 대원들의 배낭속의 짐을 나눠지기도 하면서 격려와 윽박지름 끝에 안 개 속에 희뿌연 달빛이 비치는 밤 8시가 넘어서 간신히 대청봉의 폐막사에 도착했다.
•설악산 대청봉 군용폐막사
체력적으로 거의 탈진한 대원들은 저녁 먹을 생각도 않고 바람에 날려 온 눈이 막사 안에 수북이 쌓였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판초 우의를 깔개 삼아서 침낭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깊은 잠에 들었다. 혹한의 겨울에 거의 14시간 동안 러셀을 하면서 길을 뚫었던 등반대장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눈 속을 허리까지 푹푹 빠지면서 함께 걸었던 대원들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뒤에서 처지는 대원들의 배낭 짐도 일부 받아서 졌던 나도 힘이 들긴 마찬가지였지만, 후배들의 정신적 버팀목인 선배로서 해야 할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제일 급선무는 식사준비를 해서 잠이 든 동료들을 깨워서 먹인 후 재워야 하는 것이었다. 먹지 않으면 체력적으로 탈진한 동료들에게 영하 20도가 넘는 혹한의 폐 막사 안에서 밤사이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파김치가 된 몸으로 슬로우 비디오 영화 촬영하는 것처럼 천천히 배낭에서 쌀과 꽁치 통조림을 꺼내서 식사준비를 하려는데… 잠을 자지 않고 나를 도와주는 여자 후배가 있었다. 도와주는 여자 후배와 같이 눈을 녹여서 밥을 하고 찌개를 끓인 후, 곯아떨어진 후배들을 억지로 깨워서 반강제로 먹였다. 1978년 1월 대청봉에서의 밤은 폐 막사 밖을 지나가는 거센 바람소리와 함께 도와주는 여자후배의 모습에서 언뜻 언뜻 사랑의 향기를 느끼면서 그렇게 깊어만 갔다. 대청봉에서 나를 도와 식사 준비를 함께했던 여자 후배는 수렴동 계곡에서 얼마 전에 군대를 제대한 복학생 선배가 물에 빠진 동료를 구출해내는 모습을 절벽 위 얼음 턱 위에서 가슴 졸이며 지켜봤고, 그 힘든 대청봉까지의 오름길에서도 후배들을 독려하느라 본인도 힘이 들텐데도 ‘마누라 송(Song)’을 부르며 후미를 지키던 선배의 모습이 너무 멋있게 보였다고 한다. 그 때 그 여자 후배가 바로 지금의 내 아내이다.
* 마누라 Song (축배의 노래 곡으로) 마누라~~ 마누라 마누라 때리지 마~~ 불쌍한 이 남편을 마누라~~ 마누라 마누라 때리지 마~~ 불쌍한 이 남편을 마누라가 집어던진 재떨이에 연약한 내 머리 빵구났네. 마누라~~ 마누라 마누라 때리지 마~~ 불쌍한 이 남편을 마누라가 한번만 봐준다면 다시는 영자 씨를 만나지 않겠소 마누라~~ 마누라 마누라 때리지 마~~ 불쌍한 이 남편을 마누라와 함께 걷던 그 바닷가 마누라와 함께 걷던 그 설악산 마누라~~ 마누라 마누라 때리지 마~~ 옛정을 생각해서…
•일본 북알프스 대설계에서
(아내는 영하 20도 아래의 혹한의 백담 산장에서 추운 밤을 보낸 것을 두고 “우리가 이렇게 한 이불 덮고 살게 되는 것을 알았다면 그 추운 날 꼭 끌어안고 잤을텐데…” 하며 후회 아닌 후회를 하곤 해서 종 종 나를 웃긴다. 난방이 안 되는 산장보다는 눈 위에 친 텐트 안에서 잠 자는 게 훨씬 따뜻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설악산 동계등반 후 보름정도 지난 후에 남자 후배 두 명과 설악산 십이선녀탕 계곡을 넘었는데 도중에 텐트에서의 밤은 완전 숙면을 했을 정도로 포근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