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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 칼럼



《사랑은 행동이다》나의 좌충우돌 신혼여행기
19-03-25 09:27 3,125회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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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어머니 그리고 사랑

나의 좌충우돌 신혼여행기


 

 어릴 적 외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우면 외할머니께서는 재미난 옛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나도 꽃다운 처녀 시절이 있었는데 벌써 이렇게 늙어서 쪼그랑 할망구가 돼 버렸구나. 세월이 어쩌면 이렇게도 빨리 지나가는지 모르겠다.”며 흐르는 세월과 늙어감을 안타까워하셨다. 이제 그 외할머니도 돌아가신 지 벌써 30년 가까이 되었고 세월의 무상함을 나도 절감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결혼하는 직원이 주례를 부탁하기에 나름대로 많은 시간을 들여서 원고를 만들어 주례사를 했는데 아내가 신혼부부에게 겁주는 이야기만 하면 어떡하느냐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핀잔을 주었다. “차 조심하고 물 조심해라”고 늘 말씀하시던 할머니처럼 어느덧 나도 벌써 나이가 들만큼 들어서 쓸데없는 노파심만 자꾸 늘어가는 모양이다.


 내년(2015년) 3월 말이면 결혼 35주년이 된다. 은혼식이란 말이 늙으신 부모님에게만 해당되는 용어인 줄 알았더니 어느새 우리 부부가 살아온 시간이 은혼식을 지난 지 10년 가까이 되었다. 그동안 아내와 인생의 고비를 여러 구비 넘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덧 얼굴엔 주름살이 세월의 무게인 양 느껴진다. 그래서 더 늙기 전에 아내와의 신혼여행에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글로 써보기로 했다.


 대학 산악부에서 선후배로 만나서 눈이 맞아 결혼을 하게 된 우리는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산악부 커플답게 한라산 등산을 하기로 했다. 결혼식이 3월 29일이라서 한라산에는 아직도 많은 눈이 있어 멋진 신혼여행이 되리라 판단했다. 침낭이 시원찮으면 첫날밤이 뼈와 살이 타는 밤이 아니라 추위에 떠는 밤이 될 게 뻔해서 신혼 여행에서의 가장 중요한 행사에 차질이 없도록 남대문시장에 가서 오리털 침낭을 두 개 샀다. 그리고는 남대문시장 뒷길의 재봉틀 아줌마에게 가서 침낭 두 개를 합쳐서 큰 침낭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나를 실제 나이보다 조금 어리게 보는데 그때도 서너 살은 어리게 봤다. 거기다가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불과 한 달 만에 결혼을 하게 되었고 아내는 아직 대학원 재학 중인 학생이었으니 우리의 부탁으로 침낭을 재봉질하던 아줌마는 “요즈음 젊은 것들은 시집 장가도 안 간 것들이 산속에 가서 뒤엉켜 붙어먹으려고 침낭까지 만들어 가니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지 모르겠네.” 하는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사실 그 아줌마가 그 침낭이 우리들의 신혼여행 준비물인 줄 어떻게 알았으랴? 그렇다고 “아줌마! 우리 신혼여행 가서 그 속에서 사랑하려고 해요”라고 말할 수도 없고… 어쨌든 재봉틀 아줌마의 혀 차는 소리와 따가운 시선을 뒤로하고 우리는 신혼여행 준비를 모두 마쳤다.

 그리고는 남들 하는 것처럼 하객들 모시고 결혼식을 했다. 그런데 결혼식 날 신부화장을 한 아내가 장인어른의 손을 잡고 들어오는데 그놈의 신부화장이 뭔지, 나랑 결혼하기로 한 여자가 아닌 다른 여자가 식장을 잘못 알고 들어오는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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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장의 화장으로 변장한 아내와 장인어른

 

 여기서 장인어른에 대하여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 넘어가자. 한평생을 한의사로 보내신 장인어른께서는 전형적인 옛날 양반이셨다. 성이 진주 유 씨였는데 장인어른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시는 분은 조선시대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세조에게 참수당한 사육신 중 진주 유 씨인 유성원이었다. 결혼 승낙을 받으려고 긴장된 표정으로 장인어른 되실 분을 처음 대면했을 때 “성씨가 어딘가” 하고 물으셨는데 “창녕 성가 입니다”라는 나의 답변에 “그러면 우리 유성원 어른과 같은 사육신 중의 한 분이신 성삼문 어른의 자손이구나.” 하시며 두말 안 하시고 이십 여 년 동안 고이 키운 7형제의 막내딸을 맡기셨던 분이다. 그런 분에게 우리가 신혼여행 가서 배낭을 메고 등산하고 눈 속에서 텐트 치고 잔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어서, 혹시라도 아시게 되면 신혼여행도 못 가고 파혼당하지 않을까 싶었을 정도였다.

 장인어른의 성격을 잘 아시는 장모님과 처형 그리고 처남이 합동 작전으로 장인어른 몰래 배낭 빼돌리기를 한 끝에 공항행 신혼여행 승용차(장인어른 차)에 간신히 올라탔다. 차 안에서 아내의 첫 행동은 결혼식 도중에 하고 있었던 신부화장을 지우는 일이었다. 화장을 지우고 입술의 루즈도 다 닦아낸 맨 얼굴에 학교 다닐 때 입고 다니던 낡은 등산복 차림으로 우리는 희희낙락하며 공항에 갔다.

 


 “제주도에 폭우가 쏟아져서 비행기가 못 뜹니다. 죄송합니다.”

 티켓팅하려는 순간 카운터 앞에 적혀 있는 알림 글로 인하여 제주도 신혼여행의 꿈은 사라져 버렸다. 잠시 아내와 상의한 후 한라산대신 설악산 등산으로 신혼여행 코스를 바꾸었다. 우리는 커다란 배낭을 다시 메고 김포공항에서 강남 고속터미널로 부랴부랴 가서 간신히 강릉행 마지막 고속버스를 탈 수 있었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 강릉에 도착했는데 그때만 해도 야간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서 빨리 잠잘 곳을 구해야 했다.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부탁해서 강릉에 있는 호텔이란 호텔은 다 다녀봤는데 제주도행 신혼여행 팀들이 먼저 와서 모두 차지해 버렸는지 빈방이 없었다. 시간은 어느새 11시 40분을 넘었기에 하는 수 없이 택시기사에게 가까운 여관 중에서 깨끗한 여관이라도 찾아달라고 부탁했고 아저씨가 데려다 준 여관 앞에서 방이 있다는 여관 주인의 말에 택시비 외에 약간의 팁까지 주고 여관에 들어갔다.


 그런데! 세상에 우째 이런 일이 있나?

 택시기사 그 인간은 우리가 신혼여행 왔다는 이야기(재봉틀 아줌마의 혀 차는 소리와 눈초리가 마음에 걸려서 이야기했다)까지 했는데, 안내 해 준 곳이 싸구려 여인숙이었다. 잠깐 그 여인숙의 내부를 묘사해 보자.

 우리가 잘 방은 한 평 반 정도 되는 방의 가운데를 베니어합판으로 막은 후 합판 위에 벽지를 도배해서 방을 두 개로 나누었는데 옆방과 우리 방 사이에 있는 합판 벽은 손으로 살짝 건드려도 삐걱거리면서 흔들거렸고 방은 두 사람이 하늘을 보고 누우면 좌우로 거의 빈틈이 없을 정도로 작았다. 방바닥에는 때 묻은 두꺼운 솜이불이 놓여 있었다.(방값이 2,000원인가 했는데 자장면 한 그릇 값이 600원 정도 하던 시절이었다.) 세면장은 3~4평 정도 크기의 마당 한 귀퉁이에 수도꼭지가 있어서 거기서 세수를 해야만 했다. 화장실도 여인숙 대문 바로 옆에 있어서 방문을 열고(방문을 열면 쪽마루도 없이 바로 마당으로 연결된다.) 나가야 했는데 화장실은 속된 말로 ‘푸세식’ 화장실이었다.

 화장실이 그런 것이야 참을 수 있었지만, 베니어로 막은 옆방의 부부가 조용조용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하는 소리가 베니어판 벽을 넘어서 들려오니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27년 고이 지켜온 사나이의 깨끗한 동정을 바쳐야 될 역사적인 순간에 이 무슨 기가 막힌 신혼 첫날이란 말인가? 거기다가 방바닥은 얼마나 뜨거운지 손을 대고 있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좌우지간 나는 그날 따끈따끈하게 데워진 온돌방에서 베니어 한 장 건너 옆방에 안 들리게 때 묻은 두꺼운 솜이불을 머리까지 완전히 푹 뒤집어쓰고 땀을 뻘뻘 흘리며, 아내에게 동정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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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하던 시절, 아내와의 산행



 다음 날!

 하도 더운 방이라서 잠을 설치면서 새벽 일찍 일어났다. 공동화장실 옆의 세면장에서 찌그러진 양은(알루미늄) 세면대야에 여인숙 아줌마가 가져다주는 바가지에 반도 차지 않은 더운 물로는 양이 너무 적어서 찬물을 듬뿍 타서 간신히 냉기만 없앤 물로 세수를 했다. 그런데 여인숙 아줌마도 우리의 차림새와 화장기 없는 아내의 얼굴때문에 우리를 신혼부부로 보지 않고 불량기 많은 젊은이들로 보았나 보다. 요즈음 세상 같으면 예사로 보겠지만 그때만 해도 그런 일이 흔하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했겠지만 바가지로 물을 가져다주는 여인숙 아주머니의 표정이 우리를 손님으로 대하는 게 아니라 “네 이 못된 놈들!” 하는 표정이었다. 어쨌든 대충 얼굴을 씻어내고 텐트와 2인용 침낭까지 들어 있는 빵빵한 배낭을 메고는 여인숙을 나섰다. 그리고는 허름한 식당에 들러서 콩나물 해장국으로 아침식사를 해결했다.

 강릉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설악 백담사 출발점인 용대리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강릉에서 낙산해수욕장과 속초 그리고 설악동 입구인 물치를 지나는 지금의 고속도로와 다르게 좁고 꼬불꼬불한 국도였다. 거기다가 속초에서 진부령을 넘어가는 길은 비포장이었는데 겨울눈이 녹아서 길은 온통 진창이었다. 그래도 우린 뭐가 그렇게 좋은지 이리저리 흔들리는 버스의 제일 뒷좌석에서 연신 조잘조잘 대면서 갔다.

 길이 좋지 않다 보니 강릉에서 무려 4시간이 걸려서 백담사 입구인 용대리에 도착했다. 백담사 올라가는 길을 배낭을 메고는 열심히 올라가는데 매표소 아저씨 말씀 좀 들어보소.


 “산불 조심 기간이라서 입산 금지입니다.”

 우리의 신혼여행은 첫날부터 ‘헤까닥’의 연속이다. 아침 식사를 한 후 5시간이 넘게 지났기에 매표소 부근의 계곡에서 쌀을 씻어서 밥을하고 김치찌개를 끓여 점심식사를 했다. 다시 진창길로 오랜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설악동 여관촌까지 오니 밤이었다. 그러니까 신혼여행 둘째 날은 강릉에서 용대리 왕복하면서 시간을 다 보낸 것이었다.

 어제 첫날밤을 보냈던 여인숙에 비하니 눈에 보이는 모든 여관이 호텔 수준으로 보였다. 그중 외관이 그럴듯해 보이는 여관에 들었다. 그런데 이 여관은 어제와는 또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객실 수에 비하여 손님이 너무 적어서인지 난방을 제대로 안 해 방바닥이 거의 냉방 수준이었다.

 3월 말의 설악동이었으니 산에서 부는 산 공기가 얼마나 추웠겠는가. 주인에게 춥다고 이야기했더니 조금만 기다리면 따뜻해진단다. 그런데 조금 후 따뜻해진다는 그 시간은 다음 날 아침까지 오지 않았다.

 너무 추워서 우리는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는 신혼부부가 사랑하면서 만들어내는 인위적인 열기로 추위를 달래며 간신히 신혼의 두 번째 밤을 보냈다. 오죽하면 발가벗고 자도 아쉬운 신혼여행에서 있는 옷 없는 옷 다 입고 그것도 부족해서 파카까지 껴입고 잤겠는가? 하루는 찜질방이고 하루는 냉동실이니 말 그대로 온탕 냉탕의 신혼여행이었다. 그래도 서방과 함께하는 게 좋아서인지 아니면 텐트 생활보다는 양호해서 그런지 불평하지 않고 밝은 표정으로 열심히 따라다니는 아내가 고마웠다.


 너무 추워서 새벽 일찍 일어난 우리는 입산 금지로 인해 야영을 할수가 없기 때문에 가벼운 배낭을 메고 케이블카를 타고 권금성에 오르기로 했다.

 여관촌에서 설악동을 올라가는 길에 저만치에 큰 호텔이 보였는데 대우에서 건설한 뉴설악 호텔(지금의 켄싱턴 호텔)이었다. 신혼여행 숙박지로는 너무 비참한 장소에서 이틀 밤을 보낸 우리는 여관에 돌아가서 짐을 꾸려 뉴설악 호텔로 갔다.

 세상에 태어나서 난생처음 들어가 본 호텔이었다. 신혼여행 사흘 동안 여인숙, 여관, 호텔을 두루 섭렵했는데 마지막에 호텔에 오면서 느낀 그 행복함을 무엇에 비기랴.

 “희야! 우리 첫날을 호텔에서 자고 돈 떨어져서 마지막 날 여인숙에서 자는 것보다 하루하루 레벨 업 하는 기분이 훨씬 좋지” 하곤 낄낄 거렸다. (산악회 선후배 사이였던 우리는 서로의 호칭을 ‘희야’-아내의 이름이 영희다-라고 불렀고 아내는 나를 산악부 선배 호칭인 ‘형’이라 불렀다. 형이란 호칭 때문에 시집엘 처음 갔을 때 시어머니로부터 “남편 보고 형이 뭐냐”란 꾸중을 듣고 난 이후부터는 ‘자기야’로 호칭이 바뀌었고 요즈음은 많이 늙었는지 ‘여보’라고 부른다.)

 

 대충 호텔에서 짐을 정리해 놓고는 가벼운 배낭 차림으로 산행에 나섰다. 설악산엔 차가운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작은 우산 한 개였지만 얼마나 찰싹 붙어 다녔는지 우산 한 개에 두 사람의 몸을 감추고도 여유가 있었다. 비 오는 3월 마지막 날의 설악동에는 인적이 거의 없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권금성으로 향했다. 텅 빈 케이블카를 둘만 타고 오르는데 산정은 짙은 비구름으로 덮여서 보이질 않았고 우린 구름 속을 뚫고 올라가고 있었다. 케이블카가 2/3정도 올라갔을까? 주변은 비가 진눈깨비로, 진눈깨비는 케이블카의 고도가 올라가면서 다시 하얀 눈으로 바뀌고 있었다. 권금성에 도착하니 함박눈이 펑펑 내렸고 온 세상은 은세계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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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신혼여행-계조암 흔들바위 앞 



 권금성 케이블카 상부 계류장에서 산장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발자국 하나 없었다. 눈 오는 소리가 싸락싸락 들리는 길에 우리 두 사람의 발자국이 만들어내는 뽀드득 소리는 지난 이틀 동안의 황당함을 말끔히 씻어 주었다. 권금성 산장에 도착하니 산장지기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준비해 간 쌀을 씻고 된장찌개를 끊여서 점심식사를 했다. 저만치 떨어진 자리에서 졸고 있는 산장지기 몰래 아내랑 가벼운 입맞춤을 하면서 먹는 밥맛이란(밥맛인지 입술 맛인지 분간이 안 갔지만) 꿀맛이었다. 

 그날 저녁 멋진 뉴설악 호텔에서 어둠 속에 봄비 내리는 설악의 연봉을 향한 창문의 커튼을 활짝 열고 구멍가게에서 사온 진로 포도주 (그땐 가게에 와인이라고는 진로 포도주밖에 없었다.)를 마시면서 행복한 신혼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마지막 날 아침.

 일찍 서둘러서 울산암에 올라가기로 했다. 제대로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계속 메고 다닌 골칫덩어리 배낭을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에 계신 아저씨에게 부탁해서 맡겨 두고 올라갔다. 하루 사이에 세상은 날씨가 완전히 바뀌었다. 울산암 가는 길엔 이름 모를 노란 들꽃이 길가에 곱게 피어 있었고 저만치 멀리 보이는 권금성은 하얀 눈 모자를 쓰고 있었다. 둘이서 사진을 찍노라니 길 가시던 분이 너무도 반가운 말씀을 하신다.

 “아이고! 신혼여행 오신 모양이네.”

 우리 보고 신혼여행 온 것으로 인정해 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가벼운 티셔츠 차림으로 울산암으로 올라갔다. 맑은 하늘 저편에 보이는 푸른 동해 바다의 평화로움을 보고 울산암의 가파른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신흥사 옆으로 난 하산 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니 우리의 행복한 신혼여행은 끝나갔다.

 

 신혼여행지 변경, 통행금지에 쫓김, 여인숙과 여관과 호텔, 진흙탕 길, 입산 금지, 비와 진눈깨비와 함박눈, 그리고 아름다운 봄꽃이 피어 있던 길을 걸었던 신혼여행은 두고두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뒤죽박죽의 여행이었지만 일생에 단 한 번뿐인 아름다운 신혼여행이었노라고, 지금은 말할 수 있다.

 

ㆍ신혼여행 가서 등산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권하지 않는다. 마지막 날 아내와 울산암 계단 길을 올라가는데 다리가 풀려서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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