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꼭 가고 싶은 곳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 장모님이 요즘 유행어를 아셨다면 “내 삶의 버킷리스트에 담아야 할 유일한 것은 ‘중국 여행’이야”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장모님의 연세(84세)와 건강이었다.
처남들도 장모님의 연세와 건강 상태로 봤을 때 중국 여행은 불가판정을 내린 지 오래였다. 왜냐하면 장모님은 지병인 당뇨병과 무릎 관절염이 있는데다가 체중이 65킬로그램이 넘는 풍만한(?) 몸매이셔서 혹시 여행 중 잘못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생길 수 있어서였다.
그런데 뭔가에 집착하게 되면 모든 생각이 한곳에 모이기 마련이지 않는가. 장모님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더 심해서 매 주말 우리 부부가 장모님 댁을 방문할 때마다 처남들과 우리 부부에게 집요할 정도로 중국 여행 이야기를 하셨다. 나는 아내와 상의한 끝에 우리가 모시고 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때부터 장모님은 소풍 가는 초등 학생마냥 좋아하셨기에 이번 기회에 장모님께 효도 한번 제대로 하자 생각했다. 그해 5월 노동절이 낀 연휴를 택해서 장모님과 함께 우리 부부는 단체 여행객들과 중국 북경으로 향했다. 여행을 가면서 제일 먼저 신경 쓰이는 게 장모님의 입맛! 전형적인 옛날 어른이라서 평소에 당신이 좋아하시는 것 말고는 거의 드시질 않는 분이니까 당연히 향이 다른 중국 음식은 못 드실 게 뻔했다. 그래서 고추장이나 장아찌 같은 밑반찬을 충분히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장모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가죽나물로 만든 장아찌도 두둑하게 챙겼다.
첫날 일정은 북경의 천안문과 자금성이었다. 장모님께서는 처음 보는 자금성에 감탄하시며 열심히 관광을 하셨지만 건강에는 다소의 무리가 온 것 같았다. 관절염에 당뇨가 있으신 몸으로 넓은 자금성을 구석구석 돌아보셨으니… 그날 저녁식사 시간에 장모님은 또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반찬으로 싸간 가죽 장아찌를 바로 옆에서 함께 식사하고 있는 30대 젊은 부부의 밥 위에 동의도 구하지 않고 덥석 덜어놓은 것이 아닌가. 젊은 부인은 기겁을 했다. 가죽 장아찌란 것이 냄새도 만만치 않지만 거무튀튀한 외관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겐 혐오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데 막무가내로 밥 위에 올렸으니 놀랄 수밖에… 장모님이야 호의로 한 행동이었지만, 사람에 따라서 굉장히 불쾌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참으로 난감했지만 그 부부의 남편이 벌레 무는 표정의 자기 아내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상황을 잘 수습해 주어서 다행히 큰 탈 없이 넘어갔다. (나중에 장모님 안 계실 적에 죄송하다고 사과까지 드렸다.)
•.장모님과의 중국 여행
다음 날은 오전 명십삼릉 관광, 오후는 이화원! 명십삼릉에 도착했을 때는 5월 초의 아침인데도 대륙의 기온은 이미 30도를 넘고 있었고 황금연휴를 맞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왔는지 입구부터 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어제 자금성 구경에 체력을 많이 소모하신 장모님께서는 명십삼릉 구경은 포기하고 입구에서 기다리시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등산용 은박돗자리를 입구의 커다란 나무 밑에 깔아 드리고, 간식거리도 챙겨 드린 다음 우리 부부는 명십삼릉을 관람했다. 관람을 하더라도 장모님께 신경이 쓰여서 주마간산 식으로 볼 수밖에 없었던 데다가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그나마 건조한 날씨 탓에 습도가 낮아 그늘에 가면 크게 덥지 않아 다행이었다. 심각한 일은 오후에 터졌다. 서태후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했다는 이화원을 구경하러 간 것까지는 좋았다. 가이드가 점심식사를 이화원 내부에 있는 식당에서 한다기에 식사를 하고 장모님과 우리 부부는 이화원 관람을 포기하고 장모님을 모시고 입구로 나오려고 계획했다. 그런데 우리 일행을 태웠던 버스가 처음 내려준 입구 쪽에 대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화원의 후문 쪽으로 이미 가서 그곳에서 대기한다고 가이드가 설명했다. 낭패가 돼 버린 우리들은 별 수 없이 후문까지 2킬로미터 남짓한 거리를 걸어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보통 건강한 사람이야 30~40분이면 되는 거리였지만 장모님이 그 거리를 소화하기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거기다가 우리 때문에 다른 일행들을 기다리게 해서도 안 될 일이었다. 장모님을 부축해서 허둥지둥 후문 밖의 버스 대기 장소로 갔건만, 우리들의 걸음걸이는 느리고 느렸다. 장모님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걷고 또 걸었다. 마침내 버스에 도착했을 땐 장모님은 기진맥진한 상태였고, 우리들 때문에 일행들은 오랜 시간을 기다린 후였다. 동반 여행자들에게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숙소 호텔로 들어왔다. 문제는 그때부터 나빠지기 시작한 장모님의 몸 상태였다. 갑자기 무리를 했으니 당연하겠지만 다리도 붓고 열이 나면서 호흡은 엄청나게 가빴다. 걱정이 된 아내가 장모님 방에서 거의 밤을 새우며 팔 다리와 가슴을 주무르고 했더니 다행히 새벽이 되자 열도 내리고 부정맥 증세를 보이던 심장도 안정을 되찾으셨다. 십 년 감수한 하룻밤이었다. 3일차 만리장성과 용경협! 노동절 연휴라서 팔달령의 만리장성까지 가는 길은 차가 밀려서 멀고도 멀었다. 끝내는 2~3킬로미터를 남겨두고 버스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일행들은 만리장성까지 내려서 걸어가기로 했다. 어제 단단히 혼이 나신 장모님은 버스에 그냥 계시겠다고 해서 우리 부부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만리장성을 올랐다. 만리장성 오름길의 경사가 심한데다가 무척 더운 날씨라서 땀을 줄줄 흘리면서 걷는 길이 힘은 많이 들었지만, 모처럼 우리 부부는 신혼여행을 온 것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만리장성의 장대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오후에는 용경협으로 갔다. 오전을 푹 쉬신 관계로 장모님은 훨씬 기운을 차린 듯했다. 하지만 용경협은 협곡의 산중턱에 자리하고 있어서 산을 올라야 하기에, 여기는 장모님과 주차장 주변 공원을 둘러보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그런데 아이구, 세상에나! 용경협을 올라가는 산길에 에스컬레이터가 깔려 있는 게 아닌가! 비에 젖지 않도록 거대한 플라스틱 튜브 속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해 둔 것이었다. 산에 에스컬레이터라니? 하여튼 중국인들의 엉뚱함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장모님도 못 가실 것 없지. 장모님을 모시고 공원 끝부분에 있는 에스컬레이터로 가서 함께 용경협으로 올랐다. 용경협에 올라와서 느낀 소감은 장모님 모시고 올라오길 잘했다는 것이었다. 에스컬레이터로 올라와서 카누 같은 조그만 배를 타고 좋은 경치 보면서 협곡에 고인 물 위를 천천히 유람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여행의 최대 난제는 바로 용경협에서 발생했다. 관광을 끝내고 당연히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줄로 알았더니,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만 있고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는 없었던 것이었다. 하산길은 계곡 건너편에 사람이 뚫은 인공동굴을 지나야 했다. 어두컴컴한 인공동굴을 장모님을 부축해서 조심조심 끝까지 나왔더니, 우리 앞에 고도차 200미터가 넘는 급경사의 하산길이 놓여 있었다! 장모님 얼굴색이 하얗게 변했다. “여길 내가 우째 내려가노” 나도 아내도 아찔하긴 마찬가지였다. 장모님의 체력과 상태로 그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방법은 하나! 내가 장모님을 업고 내려오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65킬로그램이 넘는 체중에 손으로 잡고 있기 곤란한 미끄러운 한복 치마를 입은 장모님을 업고 내려오다보니, 아차 하다가는 장모님을 급경사의 산길에서 땅바닥에 패대기치기 십상이었다. “장모님! 놓치면 안 됩니다. 제 어깨를 꽉 잡으세요”를 몇 번 외쳤는지 모른다. 3 0도가 넘는 날씨에 장모님을 업고 내려오느라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다 내려오고 난 뒤 나는 완전히 탈진했다. 땀을 얼마나 많이 흘렸는지 옷이 땀에 푹 젖었다. 상의를 벗어서 비트니 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아내는 자기 어머니를 업고 내려오는 남편을 보며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렇게 생고생을 하면서 장모님을 모시고 중국 여행을 다녀왔다. 그 후 어떻게 되었냐고? 집에서 아내에게 지금까지 황제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다. ●버킷 리스트 : 영화 <버킷 리스트>의 제목으로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 들’을 말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말기 암환자가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을 적은 메모를 경제적 빈곤함으로 포기해야 하면서 버킷(쓰레기통)에 버린 것을 같은 병실에 함께 있던 다른 부자 환자가 읽어보고 경제적인 도움을 주어서 두 사람만의 여행을 떠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