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news

CEO 칼럼



《사랑은 행동이다》희숙 씨 이야기
18-12-03 09:59 1,994회 0건



3556716831_1542955802.6279.jpg


제1부 희숙 씨 이야기

희숙 씨 이야기



 “희숙 씨! 표정이 왜 그래요?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네요.”

 “아니에요. 안 좋은 일 없어요.”

 회사가 뚝섬에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가까이 있는 식당에는 조선시대의 맏며느리 같이 둥근 얼굴을 가진 후덕한 외모의 조선족 아주머니가 있었다.

 우리가 식사하러 갈 때마다 항상 얼굴가득 환한 웃음으로 손님을 대할 뿐만 아니라 한국까지 와서 홀몸으로 어렵게 아들을 공부시키는 모습이 대단하다 싶어서 간혹 팁을 주곤 했었는데…

 점심시간에는 한꺼번에 몰아닥치는 손님으로 인하여 얼굴엔 온통 땀방울이 맺히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녀가 그날따라 어두운 표정으로 음식을 나르고 있기에 내가 물어본 말이었고 그녀의 답변이었다.

 나도 세상 살만큼 살았고 고등학교 동문회장에 대학교 학부 동문회장까지 했었고 기업을 경영하면서 영업의 일선에서 직접 뛰었기 때문인지 많고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나도 모르게 생긴 사람에 대한 ‘촉’이 있다. 그랬기 때문에 희숙 씨는 쉽게 자신의 기분을 나에게 들켜버렸던 것이었다.


 희숙 씨는 한국에 와서 대리운전, 공사판 막일 등 젊은 여성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까지 하면서 억척스럽게 세상을 살았던 맹렬여성이지만 외모에서는 전혀 그런 어려움을 겪은 여인으로 느껴지지 않는 조선시대 미인스타일의 얼굴을 가졌다. 그녀는 친절했고 항상 밝은 웃음으로 손님을 대했기에 누구나 그녀를 편하게 생각했고 그 식당을 다녀오면 그냥 기분이 좋았다. 그랬던 터라서 나도 그녀에게서 지난날의 억척스런 삶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믿기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녀에겐 아무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은 비밀이 한 가지 있었는데…

 이 비밀은 그녀가 나의 컨설팅을 받으면서 털어 놓았던 이야기이기에 그녀와 아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여기에서는 그녀 이름을 가명으로 밝힌다.


 고생이 되더라도 돈을 벌어서 잘 살아보려고 한국에 오다보니 젊은 나이에 외롭기도 했고 또 자신을 지켜줄 남자가 필요했기에 한국에 나와 있던 조선족 남자와 동거를 하게 되었고, 남녀가 같이 살다보니 아기가 생겼던 것이었다. 문제는 두 사람이 중국 국적이고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기가 생기다보니 아기가 그만 무국적자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국적이 없다보니 학교에 보낼 수도 의료보험과 같은 대한민국의 복지혜택을 받을 수도 없었다. 거기다가 같이 살던 남자도 국적이 없는 아기가 생긴 이후에 그것이 부담이 되었는지 훌쩍 중국으로 돌아가 버리면서 희숙 씨는 혼자서 애를 키우느라 힘든 삶에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의 삶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신의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공사판까지도 돌아다니면서 일을 해야만 했다. 딸린 아기로 인하여 그녀의 어려움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만큼 힘이 들었다. 거기다가 얌전하고 착하고 얼굴도 제법 곱상하게 생겼기에 공사판에서나 대리운전을 할 때나, 남정네들은 수컷의 본능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집적거리는 것이었다.


 어느 날 노동판에서 홀아비로 막일을 하던 조선족이 아닌 한국 국적의 남자가 관심을 가져주었기에 그녀는 무국적자인 아들의 국적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혼인신고를 하는 조건으로 그 남자와 같이 살게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그녀와 그녀의 하나 뿐인 아들은 한국 국적을 얻어서 학교에도 갈 수 있게 되었고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사회복지 혜택도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함께 살아가던 중 남자는 자기가 낳지 않은 아들에 대하여 부담을 느꼈는지 은연중에 싫은 내색을 하면서 외할머니가 있는 중국으로 보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나 희숙 씨에게서는 한국에서 자신이 배 아파서 낳은 아들이 그 어떤 보물이나 남자보다 소중했고 힘들게 한국 국적까지 얻었기에 중국으로 보낸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 한 이야기였다.


 남편의 구박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남편과의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었다. 다시 혼자가 된 그녀에게 고달픈 삶이 시작되었다. 그래도 하나뿐인 아들이 한국 국적을 취득해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었기에 아무리 힘든 일도 힘든 줄 모르고 일했고 한 푼, 두 푼 모아서 다세대주택 반지하방을 전세로 얻어서 그 나름대로 행복을 느끼며 살았는데…


 그녀가 털어놓은 안 좋은 일은 얼마 전에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듣게된 것으로 집주인이 빚 갚지 못해서 연립주택 전체가 경매 처분된다는 통고였다. 은행이 1순위이고 희숙 씨는 후순위라서 방 한 개당 기본으로 주는 돈 외에는 받아낼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이 이야기를 하면서 “제가 한국에 와서 힘들게 번 전 재산이 반 지하 전세방이고 아들과의 행복을 나누는 보금자리인데 아들하고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라는 것이었다.

 한국의 전세 등기제도를 모르고 있다가 늦게 등기를 했기에 후순위로 밀려버린 것이 문제를 만들게 된 원인이었다. 이야기를 듣고도 마땅한 해결책을 낼 수도 없었기에 마음만 너무 아팠다. 그러다 2~3일 후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떠올라서 점심때 식당에 갔다.

 “판사님께 탄원서를 한번 쓰시는 게 어떨까요? 대한민국은 서민들의 아픔을 헤아려주려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운이 좋으면 일부라도 건질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녀의 반응은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인민을 위한다는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도 그런 일이 생겼을 때 서민들을 배려해주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라는 게 부정적인 반응의 이유였다.


 “그러면 방법이 해결될 수 있는 다른 대안이 없잖습니까?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니라서 밑져봤자 본전이니까 판사님의 심금을 울리는 탄원서를 써서 제출해 봅시다. 내가 초안을 잡아 드릴테니…”

 거의 강압수준에 가까운 나의 종용과 도움으로 그녀는 마침내 탄원서를 제출했는데…

 그 일이 있고나서 얼마 후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판사님이 법원에 와서 진술하라는데 가슴이 벌벌 떨려서 정신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목소리가 떨리니까 조선족 특유의 사투리로 그녀는 그렇게 이야기 했고…

 나는 반가워서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잘 되었네요. 판사님 앞에서 잘 이야기 해보세요. 진술하라는 것은 판사님이 희숙 씨 탄원서를 읽고 해결 방법을 알아봐 주시려는 것이니까요. 한국 와서 온갖 궂은일 하면서 모은 피 같은 전 재산을 그냥 그렇게 날리면 안되지요.”

 나는 내 조국의 건강한 정신을 믿고 그녀를 격려했다.

 그러고 나서 꽤 오랜 날이 지난 후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목소리로, “사장님 감사합니다. 저의 전세 돈을 다 찾았습니다. 사장님은 저의 평생의 은인입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다 찾았다니 반가우면서도 어떻게 된 일이냐고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재판정에 가서 재판받는 원고와 피고 외에도 방청객이 엄청 많은데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진술을 했다고 한다. 들어보니 진술의 요지는 이랬다.


 “제가 한국 와서 죽을 고생하면서 번 돈의 전부가 반 지하 전세보증금입니다. 반 지하방이지만 제게는 중학교 다니는 아들과 둘이서 행복하게 사는 보금자리입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 조국인 대한민국에서 길거리에 나앉게 되었습니다. 죄라면 제가 한국의 법을 잘 몰라서 전세등기를 늦게 한 것입니다. 판사님 불쌍한 우리 모자 한번만 살려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면서 애원을 했다는 것이었다.

  결과부터 이야기하면 판사는 그녀의 진술이 끝난 후 채권은행의 담당자를 따로 불러서 불쌍한 여인과 아들을 살려놓고 보자고 설득을했는데 고맙게도 채권은행 담당자가 상급 책임자에게 문의한 후 동의를 얻어 후순위 세입자인 희숙 씨의 전세보증금을 전액 선변제해주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전화 통화하면서 재판관과 채권은행 관계자가 너무 고마워지면서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져서 전화통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환갑이 넘은 이 나이에도 나는 눈물이 너무 많아서 탈이다.


  지난번 세월호가 물속에 반 정도 잠긴 동영상을 뉴스로 보면서 베개를 적실 정도로 눈물을 흘렸는데…

 아직도 내 조국 대한민국에 사랑과 따뜻한 정이 살아있다는 게 감동이었고 자랑스러웠다. 나의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조언이 이렇게 감동적인 결과를 낳을 줄이야. 그날 나는 온종일 행복 엔도르핀이 넘쳐서 하루를 보냈다. 다시 행복을 되찾은 그녀의 중학생인 아들은 그 후 대학에 진학했고 중간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군으로 현역 복무도 무사히 마친 후 다니던 대학도 올해 초에 졸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희숙 씨의 경우를 생각하면서 나는 이런 교훈을 얻었다.

 “인생에서 부딪히는 아무리 심각한 문제라도 실낱같은 확률의 해결책을 생각했으면 그 해결책을 무조건 시도해봐야 한다. 시도도 해보지않고 지레짐작으로 안 될 거란 생각은 패배자의 몫이다.”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